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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탄생 250주년 기념전시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 베토벤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 2 : 양육권 소송과 조카 카를

 

작품 활동조차 멈추게 만들었던 양육권 소송사건

 

베토벤에 관한 이야기에는 조카 카를 판 베토벤(Karl van Beethoven)의 양육권 소송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가족사라는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도 있지만, 소송 기간동안 베토벤이 공식적으로 출판한 작품이 없을 만큼 활동을 못했고, 소송이 끝난 뒤에는 인생역정을 보여주는 듯한 불후의 명곡으로 인정받는 작품들을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조카 카를의 양육권을 둘러싸고 아이의 엄마인 요한나 라이스(Johanna Reiss)와 사이에 벌어진 소송은 1815년(45세)부터 1820년(50세)까지 5년 동안 진행되었는데, 법정 기록을 볼 때 영화 <불멸의 연인>에서 언급되는 베토벤과 요한나의 ‘연인설’은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토벤의 조카 카를 판 베토벤

1815년 11월 15일, 아홉 살짜리 아들이 있던 동생 카스파어 안톤 카를 판 베토벤(Kaspar Anton Karl van Beethoven)은 폐결핵으로 죽으면서 형 베토벤을 아들의 단독 후견인으로 정한다는 유언을 남깁니다. 그런데 사망 직전에 아이 엄마인 요한나가 공동 후견인으로 추가되는데 소송은 베토벤이 이 추가 조항을 인정하지 않아 시작되었습니다.

 

베토벤은 요한나가 어머니로서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요한나가 결혼 전에 자기 집의 귀금속을 훔쳐 가출한 적이 있으며 베토벤 동생과 결혼한 뒤에도 똑같은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녀는 누군가에게 진주목걸이를 비싸게 팔아주겠다며 접근해 목걸이를 넘겨받은 다음 경찰에 분실 신고를 하고, 얼마 후 그 목걸이를 버젓이 걸고 다니다 발각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전과도 있었습니다.

 

1815년 12월 시작된 재판에서 베토벤은 동생 카를의 추가 유언이 중병으로 죽기 직전의 상태에서 강요된 것이므로 무효에 해당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법원이 이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1816년 1월 9일자 판결에 따라 베토벤은 조카의 단독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3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1818년 1월 요한나가 1815년 소송의 관할 법원이 잘못 선정되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소송은 원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귀족지방법원인 란트레히트Landrecht 법원과 평민간이법원인 마기스트라트Magistrat 법원이 있었는데, 법원 접수처에서 베토벤 이름에 붙은 '판van'을 귀족을 지칭하는 '폰von'으로 잘못 읽은 행정 직원의 실수로 사건이 그만 란트레히트 법원에 배당되었던 것입니다. 재판은 1818년 12월 관할 법원이 바뀜에 따라 급반전되었습니다. 게다가 베토벤은 위선적인 신분 도용자로 몰리는 바람에 그때까지 지켜온 명예가 훼손되는 막대한 손해를 입었고, 그 여파로 애초에 그가 귀족법원에서 제시했던 주장이 평민법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패소했습니다.

 

이에 베토벤은 항소를 위해 요한 밥티스트 바흐(Johann Baptist Bach)라는 유능한 법률가를 고용합니다. 베토벤이 갈수록 심해지는 난청으로 항소법원의 공판에서 불리할 것으로 판단한 변호사는 당시 빈의 명문가 출신이자 고위 공직자였던 카를 페터스(Karl Peters)를 공동 후견인으로 영입하는 전략으로 승소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한나는 포기하지 않고 1820년 5월 프란츠 황제에게 청원서를 올렸지만, 이 청원서는 기각되고 베토벤의 최종 승소로 드디어 5년간의 양육권 소송은 마무리됩니다.

 


아들처럼 사랑했던 조카 카를

 

베토벤은 남동생 둘 카스파어 안톤 카를(Kaspar Anton Karl)과 니콜라우스 요한(Nicolaus Johann)이 있었습니다. 조카 카를의 아버지였던 카스파어는 1794년 빈에 와서 음악선생으로 잠깐 활동한 뒤 재무성에서 하급 은행 회계원으로 취직했으며 1815년 죽을 때까지 이 지위에 있었습니다. 1806년 5월 25일 요한나 라이스(Johanna Reiss)와 결혼했고 같은해 9월에 아들 카를을 낳습니다.

 

중년의 카를

조카 카를은 후견인으로 확정된 베토벤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카를은 자신에게 음악적 재능과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신을 유명 음악가로 키우려는 삼촌이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졌고, 그러면서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급기야 카를이 20살이 되던 1826년 7월에 일으킨 자살 소동은 양육권 소송으로 병약해진 베토벤을 더욱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당시 카를의 자살미수사건을 수사한 경찰 기록에는 “삼촌이 기대하면 기대할수록 나는 못돼져만 갔다”라는 모호한 자살 동기가 적혀 있다고 합니다. 자살 소동 후 회복된 카를은 삼촌을 떠날 생각으로 군대에 자원했습니다. 이는 베토벤에게 또 다른 충격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지인의 주선으로 카를을 군부대 장교 사관후보생으로 가게 합니다.

 

때 베토벤은 전례 없는 7악장 구성의 <현악 4중주 14번 c#단조 Op. 131>을 작곡해 조카를 장교로 받아준 장군에게 헌정했습니다. 이 곡은 지금까지 불후의 명곡으로 음악가들의 경탄과 찬양을 받아오고 있는데, 슈베르트는 “이제 남은 우리가 어떻게 그 이상의 곡을 작곡할 수 있을까”라고 감탄하면서 이 곡을 죽기 직전에 듣고 싶은 곡으로 꼽았고, 슈만은 “어떤 말로도 그 위대함을 표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베토벤이 사망하는 해인 1827년 초, 베토벤은 멀리 이글라우로 떠나는 조카와 화해의 만남을 갖게 되지만, 그 만남을 끝으로 베토벤은 영원히 눈을 감습니다. 그가 그토록 아끼고 염려했던 조카 카를은 삼촌의 부고가 며칠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베토벤의 유산을 상속한 카를은 1832년 제대 후 삼촌의 후광으로 오스트리아 국경 출입국관리소 공무원으로 임용됩니다. 그러나 프란츠 황제가 1835년 5월 14일 자로 보낸 편지에 감히 답장하지 않았다는 죄로 이듬해에 해고되어 여생을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았습니다. 다섯 자녀를 두었던 카를은 1858년 52세의 나이에 간암으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내용 출처]
34-50p. 조병선 지음. 클래식 법정:당시의 법정 기록을 토대로 재조명한 음악가들의 삶과 음악. 서울 : 뮤진트리, 2015.

[이미지 출처]
1. 어린 카를 / 49p. 오지희 지음. 이 한 권의 베토벤. 서울 : 예솔, 2020.
2. 중년의 카를 / 197p.. 제러미 시프먼 지음 ; 김병화 옮김. 베토벤, 그 삶과 음악. 서울 : Photonet : 세화전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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